기성의 모든 진리관이나 가치관의 배후에는 속물적인 타산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여 과장된 절대성의 가면을 벗기고 해방하려고 한 자유로운 진리탐구서이다. 니체는 여기에서 모든 진리나 가치의 관념은 생이 스스로의 충실•발전을 위해서 선택한, 유리한 현실해석의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인식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관은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도 절대적 진실성을 빼앗긴 것이 되어, 니체는 점점 회의와 니힐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방황시키고 수년 동안의 친구인 바그너와 헤어져야 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무한한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는 1876년 바이로이트의 바그너를 방문했으나 그곳에서 바이로이트의 음악 축제와 아울러 바그너의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환멸을 느낀 후 자유정신을 추구하고 찬양하려는 강한 열정으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허무주의와 바그너의 낭만주의적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계몽철학자 볼테르의 자유정신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이며 합리적인 형이상학과 종교 및 도덕에 관해서 비판철학의 입장에서 논의하고 있다. 다음으로 니체는 친구, 남성, 여성, 가족, 국가 등에 관해서 함축적으로 자신의 논점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실존적 의미의 개인에 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니체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 취급하고 있는 실천적, 창조적 개인은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자유정신으로서의 개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자유정신은 후기의 저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초인(위버멘슈)의 바탕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는 과학과 학문을 강조하면서 과학과 학문이 개인의 자유정신과 창조 정신을 가능하게 하는 우월한 것임을 강조한다. 야스퍼스와 같은 철학자는 니체의 중기 사상을 실증과학을 중시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과학과 학문을, 말기의 창조적 예술 활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계기로 여겼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이고 형식적인 실증과학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꿈틀대는 내면의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우리는 니체가 전통 형이상학과 결별하고 나아가서 바그너의 낭만주의 사상과 음악과도 단절하며 창조적인 자유정신을 절실히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니체 스스로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망치를 든 철학자'이며 안티크리스트이고 반도덕주의자이다. 그는 종래의 규범과 사상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종국에는 그것들을 전복시켰다.
관념론과 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을 의미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저승을 '영원한 하늘나라' 혹은 '이데아 세계'라고 부른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본질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니힐리스트이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저편세계를 상정하는 모든 종류의 이상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칸트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등인데 특이하게도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보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